왜 한국은행은 연준과 다르게 움직일까?
요즘 쏟아지는 경제 뉴스들의 상당 부분은 <금융시장이 위험해서 정부와 중앙은행이 대책을 내놨다>로 요약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에 대책도 대체로 비슷합니다.
다만 한국은행과 미국 연준이 한 일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두 기관의 정책 내용이 다른 부분에는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한국과 미국의 서로 다른 상황에 따른 정책 선택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습니다.
■ 미국은 한국과 어떻게 다른 정책을 폈나요?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대동소이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경제 위축 상황이 길게 갈 것으로 예상되면서 그 긴 시간을 돈벌이 없이 버틸 수 있는 우량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에 대한 시장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돈이 부족할 것 같은 기업들에 대해서는 자금 압박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량한 기업에는 돈을 마음 놓고 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금융회사들도 현금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량한 기업들도 돈을 빌리기 어려워졌습니다.
너도 나도 현금 사재기에 나서서 현금 가격은 올라가고 자산 가격은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유일한 해법은 누군가 제3자가 시장에 현금을 공급해주는 겁니다.
공짜로 돈을 줄 수는 없으니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들을 매입해줘야 합니다.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의 핵심은 아무도 뭔가를 사려고 하지 않고 다들 현금만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니까요)
미국은 이때 중앙은행이 나서서(돈을 찍어서)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는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직접 사들이기로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별도의 특수목적법인에 연준이 돈을 빌려주고 그 특수법인이 CP나 회사채를 사는 간접 매입 방식입니다만, 어차피 그 돈이 그 돈이니 연준이 회사채나 CP를 매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 한국은행은 어떤 카드를 꺼냈나요?
한국은행이 발표한 무제한 양적 완화는 금융 회사들(은행과 일부 대형 증권사들)에 대해 자금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금융 회사들이 보유한 국채나 공공기관 채권을 담보로 받고 필요한 돈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것도 한국은행이 필요할 때 필요한 양만큼만 해줬던 것인데 그걸 당분간은 금융 회사들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양만큼 해주겠다는 게 한국은행의 정책입니다.
■ 신용이 낮은 회사채나 기업어음은 어떻게 하나요?
사실 아무도 사지 않으려고 하는 걸 살 곳은 어느 나라든지 정부와 중앙은행 말고는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그걸 중앙은행이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걸 채권안정펀드라는 곳에서 할 예정입니다.
채권안정펀드에는 은행, 생명보험, 손해보험, 금융투자 등 금융회사들과 산업은행 등 84개 금융회사가 돈을 댑니다.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입니다.
금융회사들이 사려고 하지 않아서 위험해진 회사채와 CP를 금융회사들이 돈을 모아서 만든 펀드가 사들여서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겁니다.
사실상 정부가 금융회사들에게 ‘그러지 말고 회사채를 사지 그러느냐’면서 옆구리를 찌르는 구도입니다만, 다르게 생각하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서 회사채를 팔기만 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다들 모이게 한 후 진정을 시킨 거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한국은행은 빠져있습니다.
■ 한국은행은 왜 회사채를 사지 않나요?
금융 경색이 생겼을 때 시중에서 사기를 꺼려하는 위험 자산을 은행들이나 정부가 사들이려면 은행은 여유 자금이 필요하고 정부는 국회의 승인을 얻은 추가경정예산이 필요합니다.
둘 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이어서 쉽기로는 돈을 언제든지 찍어낼 수 있는 중앙은행이 그 일을 하는 게 제일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앙은행의 돈이 특정집단이나 특정지역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원칙입니다.
중앙은행은 금리를 조절해서 시중에 돈을 내보내거나 흡수할 수는 있지만 특정한 부분에만 따로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불공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특정지역이나 특정 분야에 집중적인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 판단은 선거로 선출된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바탕으로 그 지원 여부를 판단해서 지원하는 게 원칙입니다.
중앙은행이 임의로 그런 판단을 하는 순간 월권이어서 그동안 중앙은행은 위기 상황에서도 늘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같은 국책 금융기관을 별도로 두고 운영하는 이유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자금을 특정 분야나 특정 지역에 공급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서 시중의 자산을 매입할 경우 돈이 풀린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서 풀리는 돈이 우리나라 전체 통화량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양이지만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서 시중에 뿌리는 행위는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그 상징성이 외국인들에게 원화를 버리고 달러를 사게 하는(환율을 올리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우리나라의 시중에 돌아다니는 모든 돈은 한국은행에서 나온 돈입니다.
그럼에도 시장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어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통화량과 중앙은행이 인위적으로 시장에 공급한 통화량은 질적 차이가 있으며 후자는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불경기는 통화량 자체가 수축하거나 동일한 통화량에도 통화유통속도가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이므로 통화량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것이 오히려 평소의 상태를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의견을 가진 그룹은 한국은행이 왜 보다 적극적으로 통화 공급에 나서지 않느냐고 비판합니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정책 차이는 실제로 시장에서도 다른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회사채 금리가 떨어지고 시장이 안정되는 속도가 미국보다 조금 더 느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