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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뉴스

산업은행이 바빠진다는 건 뭔가 나쁜 일이 생기고 있다?

 

요즘 경제 뉴스에 산업은행이 자주 등장합니다.

어제도 산업은행이 저비용항공사에 700억원의 지원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두산중공업에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이 1조원을 ‘수혈’해주기로 했습니다.

산업은행이 이렇게 바빠진다는 건 뭔가 나쁜 일이 생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 산업은행은 무슨 일을 하는 은행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산업은행은 아무도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는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은행입니다.

산업은행이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그 기업은 문을 닫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산업은행이 돈을 빌려주면서 ‘지원’ 또는 ‘수혈’이라고 표현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공짜로 주는 돈은 아니고 이자를 받기로 하고 빌려주는 돈이긴 하지만 사실상 못 받을 각오를 하고 빌려주는 돈이기 때문에 ‘지원’ 또는 ‘수혈’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는 위험한 기업에 산업은행은 왜 돈을 빌려줄까요.

그냥 그 기업을 문 닫게 하면 위기가 닥치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망할 기업은 다 이유가 있고 망할 기업은 망해야 그 기업이 갖고 있던 돈과 사람을 새로운 기업에 쏟아부어서 새로운 기업이 다시 만들어집니다.

망할 기업이 망하지 않으면 새로 생길 기업도 생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론은 그렇지만 현실은 또 조금씩 다릅니다.

평소 같으면 망할 기업이 아닌데 갑자기 불어온 불황의 바람 때문에 휘청거리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그걸 대비하는 것도 기업이 할 일이긴 하지만 그 기업을 망하게 하면 그런 기업이 다시 만들어지는 데 긴 시간이 걸립니다.

 

‘왜 특정기업을 보호하느냐’는 논란과 시비만 아니라면 가능하면 보호해서 위기를 넘기게 하고 살려주고 싶은 게 정부의 속마음입니다.

실제로 기업들이 쓰러지기 시작하면 어떤 기업이 건전한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시장에서는 돈이 돌지 않는 금융경색이 발생합니다.

어느 정도 사이즈가 있는 기업은 문을 닫을 때도 조심조심 닫아야 금융 시스템에 충격을 주지 않습니다.

죽을 것 같은 기업이지만 일단 살려 놓는 건 그런 목적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큰 기업이 망해서 실업자가 많이 생기고 경기가 어려워지면 정권의 교체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이 당연히 거쳐야 할 구조조정 과정이라고 해도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게 정부의 마음입니다.

산업은행은 정부가 지분 100%를 갖고 있는 국책은행이며 그런 정부의 속마음을 따라 자금을 빌려줍니다.

 

아무튼 산업은행은 다른 은행들이 돈을 빌려주기 어려운 부실한 기업에 주로 돈을 빌려줍니다.

산업은행이 바빠지거나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 산업은행은 무슨 돈으로 대출을 해주나요?

이 질문은 부실한 기업을 무슨 돈으로 살리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산업은행은 ‘은행’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긴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예금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필요한 돈의 70% 정도는 산업금융채권이라는 채권을 발행해서 조달합니다. (줄여서 산금채라고 부릅니다)

 

산금채 이자율은 은행 정기예금보다 약간 더 높습니다.

은행은 망하면 5000만원까지만 보호 받을 수 있는데 산업은행은 정부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은행이어서 이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채권은 부도날 염려가 없습니다.

은행 정기예금보다 이자도 많고 돈 떼일 염려도 없으니 여윳돈 있는 투자자들이 이 산업금융채권을 많이 삽니다.

결국 정부가 보증을 서고 돈을 빌려서 부실한 기업을 도와주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돈을 돌려받지는 못하지만 산금채를 산 투자자들에게는 돈을 돌려줘야 하니 부실기업에 빌려줬다 못 받은 돈만큼 산업은행은 손실을 입습니다.

그리고 그 손실은 사실상 정부의 손실입니다.

우리가 늘 고민하는 국가채무는 이렇게 생겨납니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 때는 많은 시중은행들이 대기업에 돈을 빌려줬다가 떼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은행이 쓰러지면 은행에 돈을 예금한 소비자들이 그 피해를 입습니다.

(당시에는 5000만원까지 예금을 보호해주는 예금보호제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때 은행에 돈을 넣어뒀다가 그 돈 못 돌려받았다는 예금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정부가 그 돈을 메워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국가채무 가운데 약 170조원은 당시에 은행이 떼인 돈을 대신 메워주느라고 정부가 조달한 부채입니다.

 

■ 다른 나라에는 이런 은행이 없나요?

우리나라에는 산업은행과 비슷한 일을 하는 많은 기관이 있습니다.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등이 그런 곳입니다.

예를 들어 수출을 하기 위해 원료를 사와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면 은행은 돈을 쉽게 빌려주지 않습니다.

원료를 사왔다가 불량이 많이 나거나 발주처가 중간에 망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수출 계약 자체가 허위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수출을 못합니다.

수출입은행이 필요하게 된 이유입니다.

 

미국에는 이런 모든 일을 은행이 하거나 자본시장에서 합니다.

좀 의심스러운 수출기업이라면 이자를 많이 받고 돈을 빌려줍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벌어진 금융 위기를 미국의 중앙은행(연준)이 돈을 출자한 특수목적법인(SPV)이 이런 저런 회사채를 사주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미국에는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같은 상설 특수목적법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워낙 이런 일이 잦아서 아예 산업은행 같은 국책은행을 만들어놓고 늘 운영합니다.

그리고 그 돈은 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으로 조달합니다.

정부가 부채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면 국회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렇게 국회의 허락을 따로 받지 않고 간접적으로 조달하는 사실상의 국가채무가 많습니다.

 

 

유가가 급락하면서 요즘 미국의 기업어음과 회사채 시장이 마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중앙은행이 나서서 회사채 시장에 ‘구제금융’을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기업들이 갑자기 망하는 일이 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가끔’ 중앙은행이 나서서 하는 일을 ‘상시로’ 하는 기관이 따로 있습니다.

산업은행이 대표적인 그런 기관입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산업은행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